해만 및 도서(海灣及島嶼)

섬진만(蟾津灣)이 곧 섬진강(蟾津江) 하류(下流)의 해구(海口)3)로 비록 배의 노를 젓기에 불편하나 산수(山水)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우며, 남포(南浦)·골약포(骨若浦)·섬거포(蟾居浦)·차의포(車衣浦)등이 차례대로 있다. 그 만(灣) 입구에 여수군(麗水郡)의 반도(半島)가 있으니, 바로 옛날의 좌수영(左水營)으로 어획의 이익이 매우 많아서 상업이 번창하여 하나의 큰 항구(港口)가 되었다. 그 동남쪽에는 돌산도(突山島)가 있는데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앞에는 무수한 여러 섬들이 죽 늘어서 있다.

순천군(順天郡)의 진석포(眞石浦, 낙안)에 옛날의 선창(船廠)이 있고 그 앞에는 장암포(場岩浦)가 있으며, 그 동남쪽에는 고흥(高興) 반도(半島)가 있는데, 그 형상은 다섯갈래로 나뉘어 흡사 복사꽃이 땅에 펼쳐진 것과 같다. 남단(南端)에는 녹도(鹿島)·발포(鉢浦)·사도포(蛇島浦)가 있고 동남쪽에는 절이도(折爾島)·나로도(羅老島)가 있는데, 민호(民戶)에는 어획(漁獲)하고 채취하는 이익이 많다.

고흥(高興) 서북쪽에는 용두포(龍頭浦)·왜진포(倭津浦, 보성)·회령포(會寧浦)·금당도(金塘島, 장흥)·마도(馬島, 강진)·가리포(加里浦,완도 남쪽)·고금도(古今島, 둘레 105리)·조약도(助葯島)·신지도(薪智島, 강진)등은 예전부터 죄인들이 귀양온 곳으로 명인(名人)·달사(達士)의 유적이 많다.

진도(珍島)는 조선(朝鮮)의 5대 섬의 하나로 해남군(海南郡)의 삼주원(三洲院)과 석맥(石·)으로부터 바다를 30리 건너면 이 섬이 나온다. 그 요충지로는 벽파정(碧波亭)이 있고 석맥(石·)은 바다가운데를 가로질러서 파도가 심히 급하니, 실로 하늘이 험하게 만든 땅이다. 섬 가운데 금골산(金骨山)·부지산(富之山) 등의 산봉우리들이 높고 낮게 기복(起伏)하였으며 금갑도(金甲島)·남도포(南桃浦)등은 배가 정박하기에 가장 알맞다. 그 북쪽의 여러 섬들은 ‘쌍자열도(雙子列島)’라 통칭(通稱)하고 서방(西方)의 부침(浮沈)하는 곳은 ‘거차군도(巨次群島)’라 한다. 거문도(巨文島)는 고흥반도(高興半島)에 있고 연안(沿岸)의 2백리 밖에는 삼개도(三箇島)·서도(西島, 장덕2촌)·동도(東島, 유죽2촌)가 있는데, 서로 옹호하여 한 골짜기를 연장하여 이루었다. 그 남쪽에는 경왜도(更倭島)가 있는데, 문득 바다의 만(灣)을 이루어 십여대의 군함을 정박할 수 있기에 ‘합밀이돈항(哈密爾敦港)이라 칭하고 항해상(航海上)의 유명한 항구가 되었다.

지난날 영인(英人)이 축조한 파시장(波市場)과 그 퇴폐한 보루(堡壘)의 남은 터가 아직 남아있으며, 각국의 군함(軍艦)들이 종종 와서 정박하는 항로(航路)의 요충지가 되어 등대(燈臺)를 설치하였다.

완도(莞島)는 강진군(康津郡) 앞에 비껴 있는데 길이가 50리, 넓이가 20리로 산맥이 전도(全島)에서 기복(起伏)하여 높이가 2천 여척(尺)이 되며, 신지(薪智)·고금(古今)·조약(助葯) 등의 섬들과 합하여 하나의 항만(港灣)을 이루었다.4) 항구안은 장대하고 넓은 물이 깊어서 큰 함선(艦船)이 정박하기에 알맞다.

흑산도(黑山島)5)와 대흑산도(大黑山島, 옛흑산현)가 서남쪽 바다가운데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하고, 또한 홍의도(紅衣島)·가가도(可佳島)·태사도(苔士島) 등이 모두 먼 바다가운데 있다. 그밖에 지도(智島, 폐군)·압해(押海)·임자(荏子)·자은(慈恩)·비금(飛禽)·도초(都草)·하의(荷衣)·하도(下島)·보길(甫吉)·청산(靑山)·소안(所安)·평일(平日)·금오(金鰲) 등의 여러 섬들이 서남쪽 바다가운데를 둘러 서있고, 민가에는 어획하고 채취하는 이익이 매우 많다.

법성포(法聖浦)가 영광(靈光) 백옥산(白玉山)의 서쪽 언덕에 있으니 상선(商船)이 모여들어 온갖 재화가 구름처럼 모인다. 그 남해중에 돌출한 것은 곧 임치갑(臨淄岬)6)인데, 산과 바다의 풍경이 그림과 같다. 그 남쪽에 다경포(多慶浦,옛만호진)·굴내포(屈內浦)·향화진(向化津)·정족포(鼎足浦)·목포(木浦) 등이 차례대로 서로 인접해 있고, 그 서해 가운데는 칠도(七島)의 어장(漁場)이 있기 때문에 ‘칠산해(七山海)’라 칭한다. 석수어(石首魚, 조기)가 많이 생산되어 매년 봄의 고기 장수들이 크게 모여듦으로 ‘파시전(波市田)’이라 이름하였다.

목포(木浦)는 나주(羅州)의 영산강(濚山江) 하구(河口)에 있으니, 광무(光武) 7년(1903)에 비로소 개항(開港)하여 본도(本道)의 가장 큰 항구가 되었다. 서쪽으로 향하여 국(局)을 열어 세 만(灣)을 이루니 하나는 해남군(海南郡) 북창(北倉)에 통하고 다른 하나는 영암군(靈巖郡) 서창(西倉)에 통하고 나머지 하나는 나주(羅州)를 향하여 국(局)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옛 만호진(萬戶鎭)·석성(石城)·사도(沙島)·달리도(達里島)가 있어서 병풍을 이루고 호남(湖南) 철도(鐵道)의 종점이 되었다. 기선(汽船)과 기차(汽車)가 이어져 끊이지 않고 수산물·토산물이 구름 안개처럼 모이고 쌓이니 상업이 매우 번창하였다. 우수영반도(右水營半島)가 해남군 서쪽에 있으니 섬 언덕이 서북쪽으로 꺾여 돌아서 서해의 별진포(別津浦)가 되었다. 명양도(鳴洋渡)는 우수영(右水營)과 진도(珍島) 사이에 있으니 형세가 병의 입과 같았다. 추자도(秋子島)7)는 고려 원종(元宗) 때 김방경(金方慶)이 나아가 삼별초(三別抄)를 무찌르려고 여기에서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렸으므로 탐라(耽羅)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추모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이름하였다. 제주도(濟州島, 동영주)는 옛 탐라국(耽羅國, 혹 모라)은 옛날 처음에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양을나(梁乙那)8)라는 세 사람이 그 땅에 나누어 살고 비로소 나라를 개창한 것이다. 신라(新羅) 때 고후(高厚)와 고청(高淸) 등이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성주(星州)라는 작호(爵號)와 탐라(耽羅)의 국호를 하사하였다. 그뒤에 백제(百濟)에 복종하여 섬겼는데, 그 이후로 대륙에 부속시켜서 현재의 제주군(濟州郡)9)이 된 것이다. 그 땅은 멀리 남방의 해중(海中)에 있으니 북위 33도 12분으로부터 21분에 이르고, 동경 126도 8분으로부터 57분에 이르며, 동과 서가 대략 3백여리가 되고 남과 북이 대략 백3십리가 되며, 지형이 계란같이 타원(·圓)형이다.

한라산(漢拏山)은 산맥이 높고 낮게 기복(起伏)하여 전도(全島)에서 기세가 성하였으니, 동북으로 바닷가 일대에 토양(土壤)이 기름지고 비옥하며 농산물이 풍부하고 해안의 주위가 모두 깎아지른 언덕과 절벽이다. 조천(朝天)·산지(山地)·명월(明月)·차귀(遮歸)·수산(水山)·별방(別防) 등은 배를 정박시키는 곳으로 조류(潮流)가 급속히 변하면 산의 남기(嵐氣)가 때때로 일어나서 배를 정박하기가 매우 어렵다. 오직 동쪽 끝의 우도(牛島) 해협(海峽)이 가장 편하고 고요하니 거의 풍파를 피할 수 있다.